IF?

[구분선]

카오리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다.

활발한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이런 분위기, 텐션이 높은… 어떤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익숙하지 않고 끼기 힘들다는 뜻일 뿐이다. 카오리는 그렇게 밝고 활달한 성격이 되지 못했다. 자신이 이러고 싶었던 적은 없는데, 뭐. 선천적인 요인은 어쩔 수 없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멍하니 제 앞에 놓인 물만 홀짝거리며 마실 뿐이었다. 카오리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케이가 있었다면 뭔가 달랐을까.

작년에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신입생 환영회 때였나, OT였나, 아님 MT?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무튼 카오리는 이런 상황이 있을 적마다 케이에 대한 생각을 했다. 케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카오리가 지금 느끼는 이 불편함은 조금이나마 해소가 되었을까… 뭐 그런, 이루어지지 않을 망상들. 카오리는 자신의 전공에 있어 후회한 적이 없었다. 다만, 치사카 케이를 생각하자면 조금 기분이 미묘해지는 것이다. 케이랑 같은 학과를 선택했다면, 조금 더 편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랬다면 둘 중 하나는 필히 불행해졌을 테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카오리가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신입생 환영회에 2학년으로 참석했다지만, 여전히 이런 분위기에 카오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들뜨고, 정신없고, 시끄러운 분위기 말이다. 카오리는 자신이 어울리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과 특성상 밤을 세운 사람이 많음에도 여전히 활발하기 그지없는 과실에서도, 굳이 구석에 자리 잡는 것이 제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짓이라는 것도 말이다. 아마 2학년 전체 필참이라는 공지가 내려오지만 않았더라면 카오리는 오늘 제 생각대로 과실 구석에 박혀서 라인이나 두드리며 있지 않았을까?

목이 말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면 이 분위기가 너무나도 어색해지는 것이다. 머쓱하게 앉아있는 것도 이제는 슬슬 한계였다. 제 앞의 물잔을 무의식적으로 집어 입에 털어 넣고 나서야 카오리는 그 글라스에 담겨있던 것이 물이 아니라 술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큰 잔에 도대체 어떤 사람이 물이 아니라 술을 담아놓을 생각을 했을까. 저 멀리서 신입생들에게 술을 권하며 돌아다니는 제 동기를 빤히 바라보던 카오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술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카오리의 주량은 평균에 아주 조금 못 미치는- 그러니까, 평균이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스물한 살 즈음 먹은 대학생이라면 제 기본적인 주량이 얼마만큼 되는지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더 앉아 있다가는 제 주량을 아득히 뛰어 넘길 것이 분명함을 깨달은 카오리가 슬슬 감겨오는 눈에 힘을 주었다. 바람이라도 쐴까, 그런 생각을 하며 카오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겨 들었다.

“아마누마, 어디 가?”

“선배, 어디 가요?”

저와 말을 튼 지 약 삼십 분 가량 된 후배와, 몇 없는 친한 동기 중 한 명이 제게 그렇게 물어왔다. 나 잠깐 바람 좀 쐬러…. 뒷말을 흐리는 카오리의 말에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둘은 다시 신입생 환영회의 들뜨고 정신없는 분위기에 녹아든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저와 비슷하게 머쓱한 티를 내며 앉아 있는 몇몇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뭐, 아무렴 상관없나. 자신이 여기저기 말을 살갑게 잘 거는 스타일이었다면 또 모르는 일이었다만 안타깝게도 카오리는 그런 성격이 되질 못했다. 카오리는 자리에 앉아 얌전히 앉아있는 쪽이었으니 말이다. 그저, 그 친구들에게도 살가운 누군가가 와 이야기를 걸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문을 열고 나가자 서늘한 2월의 바람이 뺨에 와닿았다. 차가운 공기에는 특유의 향이 실려있었다. 늦은 겨울에나 느낄 수 있는 건조하고 서늘한 향이 좋았다. 몸에서 슬슬 올라오는 술 냄새마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을 정도로, 오늘의 공기는 딱 좋았다. 패딩을 여며 목 끝까지 덮은 카오리가 숨을 내뱉었다. 술 냄새가 섞인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카오리가 습관처럼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케이네도 오늘 신입생 환영회라 그랬던가? 잘 기억나질 않았다. 물론, 거긴 좀 더 자유로워서 그런지 필참이 아니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술기운에 잘 생각나지 않는 기억을 더듬어 케이와 나눴던 라인을 떠올렸다.

[너랑 같은 식당인데?]

어렴풋이 케이가 보낸 라인 메세지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식당에 있는 사람들 수가 우리 과만 있다고 하기에는 조금 많긴 했더랬다. 그걸 지금 와서야 깨달은 카오리가 아, 하는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려 연 잠금화면에는 라인 메세지 몇 개가 띄워져있었다. 스팸 문자, 고등학교 동창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오늘은 몇 시쯤 들어올 생각이냐고 묻는 어머니의 메세지, 그리고 치사카 케이의 메세지.

많이 마신 거?

다정함이라고는 쥐뿔도 보이지 않는 그 짧은 문장에서는 치사카 나름의 다정이 묻어있었다. 아, 맞다… 케이. 제가 이름으로 부르자고 해놓고서는 카오리는 가끔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곤 했다. 특히 술을 마신 지금같은 상황이이라면. 알코올에 찌들 대로 찌든 뇌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질 못했다. 카오리가 멍하니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자니 그새 제 얼굴을 인식한 영리한 스마트폰은 제 멋대로 잠금을 풀어댔다. 쓸데없이 똑똑하기만 했다. 자물쇠가 풀리는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오리가 핸드폰 액정을 톡톡 눌렀다.

조금

말풍선 옆의 1은 깜빡, 제가 보내자마자 사라졌다. 할 일이 없긴 한가 보지. 픽, 웃음을 흘린 카오리가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며칠 전 눈이 와서인지 지금까지도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 위에 앉았다가 옷을 버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마셨는데.

잘 안 마시잖아.

사고였어, 진짜.

우리랑 같은 식당 맞지?

아마?

몇 번의 대화가 이어진 끝에 숫자 1은 다시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를 멍하니 지키고 있었다. 카오리는 그 뜻을 알고 있었다. 케이가 자신을 데리러 온 적도 많았지만, 자신이 케이를 데리러 간 적도 많았으니까. 굳이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도, 제 몸을 가눌 수는 있어도… 그래도, 뭐랄까. 술 마시고 혼자 집에 가는 것보다야 둘이 있는 게 좀 더 안전하고 안 심심하고 좋지 않나? 그런 생각이나 하며 카오리가 핸드폰 액정을 다시 두들기고 있을 때쯤이었다.

딸랑, 하는 술집 특유의 종소리가 울리며 제 옆에 앉아있던 과 동기가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라도 쐴 생각이었는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카오리를 알았는지 동기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아마누마, 또 몰래 들어가려고?”

“...어어, 그… 뭐….”

“하하, 알았어, 알았어. 그 친구 오나 보네?”

“응, 아마…?”

온다는 말은 없었으니… 잠시 눈을 굴리는 카오리를 보며 동기가 하하, 밝게 웃음을 지었다.

“됐어, 그래놓고 갈 거면서. 선배들한테는 내가 잘 이야기 할게. 조심히 들어가고.”

“고, 고마워….”

제 답에 동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제가 집에 가기 전에 한 번 보는 것이 목적이었나 보지. 그런 것만 봐도 제 동기는 좋은 사람이었다. 치사카 케이와 같은 과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카오리는 지금도 꽤 만족스러운 학교생활이라 생각했다. 들뜬 분위기도, 정신 사나운 음악과 술 냄새도 전부 제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밌으니까. 사람들과 함께 섞여있는 분위기에 빨리 지칠 뿐이지 카오리가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분위기에도 한 번쯤 섞여 있는 것 역시도 싫어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날마다 케이와 함께했던 조용하고 한적한 시간들이 그리워지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말이다.

편한 옷차림으로 저 멀리서 느긋하게 걸어오는 치사카 케이를 발견한 카오리가 손을 흔들었다. 케이는 그런 자신을 보고도 여전히 느긋한 발걸음을 유지할 뿐이었다. 얼굴에는 벌써부터 잔소리가 한가득이었다. 시끄러운 술집의 소음마저도 이젠 들리지 않았다. 치사카 케이와 함께 있을 때면 늘, 모든 일상이 조용하고 평화로워졌다. 기묘한 일이었다.

[구분선]

IF?

[구분선]

치사카 케이는 오늘도 아마누마 카오리를 데리러 나왔다. 별 이유는 없었다. 그저 여자애가 혼자 술 마신 채로 집에 가는 게 걱정이 되기도 했고, 카오리리 역시 자신이 술을 마신 날이면 나와서는 숙취해소제를 손에 쥐여주곤 했으니 말이다. 케이와 카오리에게는 이게 당연한 일이었다.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양 손으로 뺨을 문지르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드물게 주량을 간신히 지킨 것이 분명했다. 라인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 많이 마신 것 같지는 않더니만. 픽, 웃음을 지은 케이가 다가가자 카오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보다 한뼘 정도 작은 위치에 선 정수리가 맥없이 흔들렸다.

“취했네.”

“아니 뭐… 그 정도까진 아니지 않, 아? 이 정도면 멀쩡하다고, 생각했는데….”

카오리의 말투는 처음 봤던 고등학생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른 애들과 이야기하는 걸 들을 때면 조금 성숙해지긴 했나…. 싶다가도 저와 이야기를 할 때면 여지없이 고등학생 시절의 카오리가 떠오르는 것이다. 어휴, 잘하는 짓이다. 속으로만 생각하며 케이가 주머니에서 차가운 숙취해소제를 내밀었다.

“마셔. 내일 또 머리 아프다고 후회하고 울지 말고.”

“...안 그러거든?”

“쓸데없이 허세 부리지 말고.”

제 놀리는 듯한 말투에도-사실 진짜로 놀린 거였지만- 카오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치사카 케이는 카오리의 이런 면이 좋았다. 순진하다고 보일 정도로 자신이 믿는 상대방의 말이라면 껌뻑 속아 넘어가는 것 말이다. 놀릴 맛이 난다고도 하고, 같이 놀기 편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뭐, 둘 중 어느 쪽인지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어쨌든 치사카 케이는 카오리와 함께 있는 순간이 좋았다.

편해서,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서? 뭐 그런 이유들 있지 않은가. 우정을 쌓을 때 중요한 것들. …그러니까 치사카 케이는, 제 친구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이 밤중에 카오리를 데리러 나온 것이었다. 툭, 숙취해소제의 뚜껑을 따는 경쾌한 소리가 한 번 울렸다. 술집과 꽤 떨어진 것 때문인지 이 조용한 밤거리에는 탄산이 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단숨에 숙취해소제를 비워낸 카오리가 크으,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일부러 여성용이 아닌 걸 사와서 그런가? 작게 미소 지은 케이가 손을 내밀자 카오리가 그 위에 빈 숙취해소제 병을 올려놓았다.

“그나저나 뭐…하고 있었어?”

도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자신의 연락을 그렇게나 빨리 받았냐는 속뜻이 숨겨져 있는 물음. 뭐 하고 있었더라…, 케이는 방금까지 집에서 누워있었다. 늦은 밤인 탓에 악기를 연주하지는 못하고, 손으로만 코드를 외우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와중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아마 과방에서 카오리와 함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치사카 케이의 하루하루는 그랬다. 그렇게까지 별일이 있지는 않은, 평화롭다면 평화롭다 말할 수 있는 하루들. 케이는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애시당초 자신의 성향이 시끄럽고 활발한 어떤 것들과는 잘 맞지 않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제 친구 또한,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이겠지.

카오리는 자신과 비슷했다. 같지는 않다. 그저, 조용한 분위기를 즐길 줄 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주 어린 어떤 날에는 서로가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너와 내가 완전히 같다는. 어리기에 할 수 있는 착각 같은 것 말이다. 카오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고 케이 또한 그 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뱃속에서 나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인데, 우리는 그때 채워질 수 없는 어떤 것을 서로에게서 채우려고 했었던 것도 같다.

치사카 케이라는 사람은 그리 성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그 당시의 아마누마 카오리 역시도 같았다. 둘 다 그리 성숙한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서로 빙 돌아왔어야만 했다. 서로를 이해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애시당초 자신이 무언가를 먼저 말하지 않는 성격인 탓이 크기도 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글쎄, 잘 모르겠네. 케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카오리의 숨에서는 짙은 술 냄새가 섞여 났다. 섬유유연제 향과 짙은 술 냄새가 섞여 있는 것이, 꽤 우리가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는 걸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섬유유연제 냄새만 나던 고등학생 시절의 카오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 밝지는 못했던, 수줍음 많던 애. 동급생,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나이에 서로가 같다 여겨버렸던 실수 같은 것들? 아마 카오리와 함께 했던 시간들 모두가 실수였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아마 카오리와 싸웠을 때 같긴 했는데. …타고난 성정이 이래서인지 일기 같은 걸 쓰지 않는 탓에 지금 와서는 정확히 어떤 생각을 했는지까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간에 치사카 케이에게 있어서 카오리는 소중한 친구였다. 같이 있는 시간을 편하게 즐길 수 있고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친구. 책에서만 들었던 것 같은 친구라는 관계를 가장 이상적으로 그릴 수 있는 상대가 카오리였다. 카오리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뭐. 친구니까. 서운할 수도 있는 거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물론 카오리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애초부터 다른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태초부터 다른 성정을 가진 사람들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애매하게 닮은 사람이랬다. 치사카 케이에게는 아마누마 카오리가 딱 그랬다. 비슷해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차라리 아예 달랐으면 이것보다 더 이해를 잘할 수 있었을까, 싶었던 사람. …이제 와서는 다 옛말이다. 치사카 케이는 아마누마 카오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잘 알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도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너랑 같은 과에, 갔으면… 어땠을까?”

그러니 치사카 케이는 카오리의 이러한 말에도 할 수 있는 말이 한정적인 것이다. 케이가 카오리를 곁눈질로 스윽 훑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도, 좋아 보이지도 않는 표정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제 뺨을 문지르며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빤히 바라보던 케이가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는데.”

“생각해 봐, 그것도 꽤 재밌지 않았을까?”

“애초에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한 건데? 역시 취한 거냐?”

“아니라니까.”

“그냥, 너랑 나는 다르잖아.”

“그건 그렇지만….”

카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의 말뜻을 알아차린 까닭일까, 아쉬운 기색은 묻어나왔지만 섭섭한 티는 없었다. 애초에 우리는 조금 다르다는 말은 선을 긋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었다. 아마누마 카오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싶어했고, 치사카 케이는 적당히 1인분만 하면서도 제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던 어린애였으니까. 지금도 애가 아니라는 말은 못 하겠다만은.

카오리와 함께 하는 대학 생활 같은 건 생각만 해도 재밌을 게 분명했다. 각자의 과실에 앉아 있을 필요도 없이, 하나의 과실에 앉아 평화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거다. 함께 시간표를 짜고, 같은 교수의 수업을 들으며 과제를 하고. 오늘처럼 신입생 환영회가 있는 날이면 혼자 어색하게 앉아있을 필요도 없었겠지. 케이 본인의 신입생 환영식 당시에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이게 더 재밌지 않나.”

“...그래?”

“난 그래.”

“하긴, 좀… 같은 과였으면, 으음… 생각도 못 했을 일이 좀 많긴, 했지….”

카오리의 눈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생각을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 흘리듯이 말했던 ‘일면식 없는 선배들과 함께한 조별 과제’ 같은 걸 생각하는 것이 뻔하다. …케이 역시 조별 과제에 있어서는 카오리와 같은 경험을 했다 그리 말할 수 있었으니, 어느정도 공감하는 바였다. 내향인들이란 이래서.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조금 덜 긴장했을까, 카오리가 여기 있었다면 좀 더 편하게 하지 않았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카오리가 선배들이 시키는 말에 넵,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따위의 말만 반복하며 뚝딱이는 모습이 절로 상상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푸핫, 웃음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왜, 왜 웃어? 울상이라면 울상이고, 삐졌다면 삐진 듯한 표정을 지은 카오리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제 팔뚝을 꾸욱 쥐었다. 아니, 별 건 아니고. …뭐, 뭔데. 빨리 말해. 얘는 술을 마시면 힘이 세지는 걸까. 손에 힘이 얼마나 들어간 건지, 근육이 올라오는 것이 보일 정도로 제 팔을 꾸욱 쥐고 있는 카오리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낸 케이가 입을 열었다.

“아니, 별 건 아니고… 그냥 예전에 조별 과제 했던 거 생각나서.”

“조별 과제…? 넌 뭐 그런 걸 상상하면서 웃는 건데… 너야말로 마셨니? 취했어?”

조별 과제 네 글자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카오리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다.

“저번에 뭐라 했더라,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끼어있느니 차라리 간접흡연이 낫다고 했나?”

“...잘도 기억하네, 그거.”

“웃기잖아.”

깔끔한 케이의 답에 카오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렇지 좀, 끊어.”

오랜만에 듣는 잔소리가 마냥 반갑다면 그건 저도 취한 걸까. 잘 모르겠다. 하도 카오리의 알코올 섞인 체향을 맡아서인지 케이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미 술집이 있는 유흥가에서 멀어진 지는 오래였고, 대학에서는 조금 떨어진 카오리의 집까지는 20분 정도가 남아있었고.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차는 이미 다 끊긴 지 오래였다. 아마 카오리를 데려다주고 나면 혼자서 30분 남짓 이 길을 다시 걸어야만 제 집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다.

술 취한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한 시간 남짓을 쓰는 비효율적인 행위는 역시 이게 우정이기에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케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 패딩 주머니 속에는 카오리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털어마신 쓰디 쓴 숙취해소제 빈 병이 남아있었다. 자신이 술을 마셨을 때 카오리도 그랬을까. …아, 차라리 신입생 환영회에 빼지 말고 올 걸 그랬나, 어차피 올 거면. 그런 생각이나 하며 케이가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카오리의 보폭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만약에….”

“만약에?”

카오리는 만약을 들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케이 또한 그에 잘 맞추는 편이었다. 카오리가 만약, 을 들어 이야기하는 주제가 보통 ‘100억 받기 VS 얼굴 랜덤 돌리기’ 같은 시시콜콜한 주제라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좀 아니었나 보다. 한참 뜸을 들이던 카오리가 입을 다시 열어 말을 이어나갔다.

“진짜로 만약에, 우리가 친구가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뭘 물어. 이럴 일도 없었겠지.”

제 팔을 여태 부여잡고 있는 카오리의 손을 가르킨 케이가 불퉁하게 말했다. 멍한 눈으로 제 손을 빤히 바라보던 카오리가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그렇겠네…. 카오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면, 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저 우리가 친구가 아닌, 모르는 사이었다면 따위를 가정하고 싶음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저, 카오리는 케이가 그렇듯이 제 옆에 편한 사람이 한 명쯤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케이가 매번 카오리가 없는 과 생활을 할 때마다 으레 그렇듯이 말이다. …말했잖아, 우린 비슷하다고. 다르지만, 비슷해서 서로를 이해하기에 한참 걸렸던 것처럼. 우리는 그냥 그런 애들이라고. 이제 서로가 친구가 아닌 세계선 같은 건 생각 못 한다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케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만약에 같은 거 그만 봐. 재미 없어.”

그저 케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불퉁한 잔소리 뿐이었다. 카오리는 그저 재밌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앞으로만 쭉 가면 15분이 남은 길을 한 번 흘긋, 본 케이가 발걸음을 틀어 공원으로 향했다. 이 길로 가면 30분은 족히 더 걸렸다. 비효율적인 짓의 끝판왕 같은 거지. 그만큼, 친구랑 더 놀고 싶다는 뜻이다. 그런 케이를 아는지 카오리는 얌전히 저와 발을 맞출 뿐이었다.